공예에서 재료, 기술, 형태를 기반으로 한 분류체계와 지칭의 역사는 매우 깊다. 흙, 유리, 나무, 섬유, 금속 등 각 재료를 기반으로 공예의 영역을 분류하는 것, 작업자들을 재료에 가家를 붙여 지칭하는것 역시 재료, 기술, 형태를 기반으로 공예를 이해, 접근해 온 오랜 관습이다. 문제는 공예가 실용적 사물 혹은 그것을 만드는 기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역과 결합, 의미와 역할이 복잡다단해지면서, 재료, 기술, 형태를 기반으로 한 분류체계와 접근이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흙, 유리, 나무, 섬유, 금속 등의 재료는 비단 공예만의 것이 아니다. 순수예술뿐 아니라 공산품 그리고 건축 등 예술 이외의 산업 전반에까지 두루 사용하는 ‘재료’다. 기법 역시 공예 장르뿐 아니라 순수예술, 산업과도 상당 부분 겹친다.
특히 현대 공예가들은 재료 혼성은 자기 장르에 갇히지 않고, 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장르 혼성hybrid 현상, 재료와 기술의 혼성은 보편화다. 공예가들이 재료, 기술에 대단히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만큼, 장르 혼성은 현대공예의 대세이자 새로운 출연의 동력이다. 이 현상은 기술 전통을 계승, 보존하려는 전승 장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재료, 기술, 형태를 기반으로 한 공예의 이해, 범주설정, 체계는 공예를 이해하는 효용성에 있어 수명을 다했다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여전히 공예장에는 재료, 기술, 형태를 기반으로 여전히 공예를 이해하고 규정하려는 시도가 여전하다. 이미 오염되거나 변질, 낡은 줄 알면서도 익숙한 도구에 손길이 가는 것을 멈추기 쉽지 않은가 보다. 최근 한국 공예 전시에 는 여전히 재료, 기술, 형태,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일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획자들의 시도가 자주 목격된다. 작가의 드로잉, 작업 노트, 재료실험과 같은 아카이브도 자체의 미학적, 기술적 의미보다 과정 혹은 도구로서 활용하고 있다.
2015청주공예비엔날레는 공예가 4인의 제작 도구 아카이빙을 기획전 초입에 전면 배치했다. ‘도구HANDS+ : 예-술 그리고 노동’ 파트는 재료가 공예작품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준다는 기획 의도 하에 박순관(도자), 김준용 (유리), 박홍구(나무), 조효은(제본) 총 4명의 재료, 도구를 전시했다. 2022년 서울공예박물관의 《백자: 어떻게 흙에다 가 체온을 넣었을까》 전은 박물관 측에서 개발한 이동형 아카이브 상자 안에 백자 관련 자연 광물과 실험 편片 등을 넣어 전시했다. 또한 서울공예박물관은 2023년 현대 금속공예가 유리지의 대규모 기증을 기념하며 기획한 《사유하는 공예가 유리지》전과 2023년 KZ 프로젝트 특별기획전 《만년사물》전에서도 작가의 작품, 동료나 제자 등 관계자 인터뷰 영상, 작업 과정 사진, 제작 노트 등 아카이브를 중요하게 다루며 연출했다. 특히 《사유하는 공예가 유리지》전의 후반부 체험관람 콘텐츠 <사유하는 작업대>는 故유리지의 선반 테이블과 도구 등을 비롯하여 동료, 후배 작가들의 테이블, 도구, 드로잉 등을 전시장으로 옮겨와 마치 배우 없는 연극무대처럼 보였다. 관람객이 작가가 작업하며 앉았던 테이블, 사용했던 도구와 재료를 보면서 작품의 제작 과정을 체험, 상상하는 교육형 활동을 위한 관객 눈높이 맞춤형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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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공예박물관 측은 민자연사연구소 소장 <천연광물> 17종, 1997년 요업기술원(현, 한국세라믹기술원)이 전국의 도자기 원료를 채취하여 구축한 실험자료, 1990~2014년 명지대학교 한국도자기연구센터의 실험자료를 전시물로 사용했다.(https://museumnews.kr/323ex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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