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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월호 | 칼럼/학술 ]

[소소담화40] 무너지고, 부서지고, 터지고, 갈라진 흙
  • 홍지수 공예평론, 미술학박사, 크래프트믹스 대표
  • 등록 2025-05-02 1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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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어로 ‘힙Hip 하다’라고 하면,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개성이 강한 것’을 의미한다. 이 ‘힙’을 가장 반기고 열망하는 이를 꼽는다면, 예술가들이 아닐까? 어느 시대나 가장 트렌디하고 독창적이며 개성이 넘치는 스타일이나 태도를 추구하는 자들의 선두에는 늘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 도예의 ‘힙’은 무엇인가? 1950년대를 기점 삼는 현대도예의 역사 가운데 1950년대 미국 현대도예의 효시로 꼽는 피터 불커스(Peter Voulkous, 1924-2002)와 오티스그룹Otis Group, 1960년대 펑크 아트가 낳은 스타 로버트 아네슨(Robert Arneson, 1930-1992), 1970년대 슈퍼 오브제의 기수 하워드 코틀러(Howard Kottler, 1930-1989)를 위시로 현대 도예가 시대에 따라 여닫은 마디를 살펴보면, 많은 작가들이 초현실주의와 다다의 전위성에 의지해 자신보다 앞서 출현한 미술 혹은 공예의 관습과 당위성을 반박하고 대안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피터 불커스는 2미터가 넘는 대형 흙조각에서 물레 돌린 기둥, 접시를 가르고, 구멍 뚫고, 표면을 가르며 자유롭게 이어 붙이고 변형함으로써 도공들이 그릇 빚는 흔하고 값싼 공예 재료인 흙을 조형재의 차원으로 바꿨고 더불어 도자 조형Ceramic Sculpture이라는 조각의 영역으로 사람들이 흙, 도예에 갖고 있던 인식을 바꿨다. 

굽지 않은 흙Unfired clay은 소위 1970년대 현대 도예가들이 도자예술의 통념과 ‘공예다움’에 도전하는 전위 실험이자 ‘힙’한 유행이었다. 짐 멜처트(Jim Melchert, 1930-2023)의 「변화 Changes」(1972, 암스테르담)는 도예가들이 흙과 함께 도자예술의 필수로 꼽는 ‘불(번조)’을 가마의 화력 대신 가장 근원적인, 최초의 화력 ‘햇빛’과 인간의 체온으로 놓음으로써, 오히려 그 어떤 도자예술 작품보다 열 그리고 시간에 의해 변화하는 흙의 물성, 표현의 재료로서 흙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의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굽는다fire’라는 동사 그리고 ‘어떻게how’라는 매체의 근원적인 성찰과 질문, 도전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전위다. 1970년대 슈퍼오브제Super Objects 스타일로 익히 알려진 빅터 시칸스키(Victor Ciansky, 1935-2025)는 기존 스타일과 의외로 1970년 15cm 남짓 10개의 흙덩이 표면에 ‘Unfired clay, ciansky’라는 문구를 압형으로 눌러 찍어 중온에 구운 작품을 발표했다. 1960년대 이후 불거진 환경운동의 영향으로 도예가들 역시 자연환경의 오 염, 소모에 대한 반성이 ‘굽는다’라는 영원 불변성에 대한 회의를 품었다.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날것으로서 흙’에 대한 도예가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1968년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38-1973)이 물질주의적 예술에 반하며 제시한 대지 미술 또한 1970년대 도예가들의 비非소성 작품 시도 유행에 일조했다.

일본 도예가 고이에 료지(Koie Ryoji, 1938-2020)의 「체르노빌 연작 Chernobyl Series」(1989–90)은 앞선 ‘굽지 않는’의 의미를 좀 더 복잡한 개인 그리고 사회의 역사적 사건이 점철된 근원적인 물음을 흙으로 전개한다. 흙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토대요, 모든 생태계의 터전이며, 유한한 생을 살다가는 인간이 감히 가늠하지 못하는 영겁을 품은 타임캡슐이다. 그는 동양의 사유체계 하에 인간성 상실의 문제로 부각된 물질문명의 폐해를 경고하며, 태초의 물질 흙을 물水이라는 모태의 힘으로 대자연으로 돌려보낸다. 굽지 않은(혹은 형태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온도로 구운) 흙, 정제되지 않은 광물 파우더를 파도의 위력에 내맡기고 존재 소멸하는 순환의 과정을 보여준다. 료지의 작업은 1940년대 야기 카즈오八木一夫가 주창한 일본 현대 도예가 전위 실천에 대한 후세대로서 전 세대와 차별화하기 위한 고도의 미학적 전략 그러면서도 앞서 시대의 전위를 계승하는 신세대의 힙스러움으로 비친다.

그렇다면 최근 현대 도예의 장에서 가장 힙Hip 한 작가, 작품은 무엇이며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힙함’을 무기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자들은 기존 장에 새로 진입하려 하거나 기존 장의 질서와 위계에 포섭되지 못한 작가들이다. 비주류일수록 앞선 세대의 전략과 질서에 균열을 내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지류를 바꿔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장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앞선 세대의 성과뿐 아니라 속한 매체의 역사, 유산이 견고하고 두터울수록 이상의 것, 새로운 것을 내놓기가 더 어렵다.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예술의 종말을 말한 이후, 20세기의 현대미술이 스스로 축적해 온 역사와 방법론을 해체하거나 전유하는 것은 더 이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움을 만들 수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방증이 아닐까.

요즘 주요 국제 비엔날레 전시, 도예 공모전의 출품작에서 굽지 않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터지고, 갈라진 흙 혹은 흙이 아닌 작품(미디어, 퍼포먼스 기록물)을 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2015국제 공모전(전시감독 박경순)의 경우 ‘도자의 영역확장’이라는 지향에 맞게 출품작을 비 도자작품까지 확대했다. 개방성 덕분에 기존 도자예술의 범위를 벗어난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의 작품이 대거 등장했다. 그나마 ‘흙/도자예술’이라는 주제 제약을 둬서 영상 속에 흙을 주무르고 쌓고, 무너트리고, 물에 녹이고, 던지고 몸으로 뭉개는 다양한 표현들이 등장했지만, 나의 기억에 그것이 비소성, 탈도예, 완성의 불가역성을 미학적 전략으로 혹은 전위의 무기로 위력적이거나 ‘힙’하게 보이지 않았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5년 4월 호를 참조 바랍니다. 정기구독(온라인 정기구독 포함)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PDF로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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