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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의 귀중한 도자기 서적 하재일기 편집부 2009-06-13 12:59:46

도자 생산에 따른 기록들
일기에는 많은 7언 절구의 창작시를 읊어 정리하였는데 그 중 4월 5일에 지은 <자창요연磁廠窯煙>이라는 제목의 시는 분원의 가마에서 매일같이 주야로 불을 때느라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은 모습을 보면서 모든 도공들이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관요이긴 하지만 마치 자신의 가마처럼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감동적인 시상으로 읊은 것이다. 이는 도자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시라 하겠다.
 당시의 분원에는 몇 기의 가마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씨가 분원에 한 달 이상 머무르는 기간인 3월 16일-4월 18일까지에는 정확하게 5-6일에 한번씩 가마에서 도자기를 꺼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분원이 폐쇄 되었다는 1883년으로부터 8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분원의 운영에 대한 연구에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제물포로 수입된 청화 재료인 일본제 코발트를 사기 위하여 일본인 다니가와, 사까이가 운영하는 상점 두 군데를 수없이 허탕을 치면서도 몇 달 동안 드나들며 어렵게 구입하는 장면으로 보아 청화 안료가 몹시 귀했으며 이는 곧 청화백자의 수요가 상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6월에는 분원의 화공이 타인과 다투어 구속이 되자 그를 석방하기 위하여 대단히 걱정하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솜씨 좋은 화공의 주가도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월 23일에는 가마 지붕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 밑에 늘어놓은 날그릇을 몽땅 망가뜨리는 일을 겪는데 상당히 추웠을 것으로 예상되는 겨울에도 도자기 성형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날은 그릇 본을 찍어낼 두터운 판각 장지를 산 대목도 있어 도자기 제작 도구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등장하기도 한다. 부서진 가마 지붕의 기둥으로 쓸 나무를 베기 위하여 2월에 가서야 허락을 받아내는 일도 하재의 몫이다.
 
담당 관리들의 수탈과 대응
 1883년에 분원이 폐지되었다는 도자사를 통한 지식이 있었지만 하재일기에 의하면 1891년까지도 관요에 대한 지원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고 궁궐과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하는 대신 정부로부터 각종 세금 수입 혜택과 운영비를 지원받았으며 시장 판매에 대한 독점권까지 보장받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담당 윗사람들은 은근히 뇌물을 원했으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협박까지 일삼는 통에 수시로 도자기, 땔감, 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때로는 납품기일을 어기거나 견본품보다 못한 기물로 납품을 하면 질타를 받거나 퇴짜를 당하거나 가격을 깎기도 한다. 이에 지 씨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궁에게 퇴짜 맞은 그릇을 발로 차서 깨뜨리기도 하였다. 8월에 상일동 이 참판은 묘지석을 6일 만에 구워오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가 도자기 일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일로서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도자기의 종류와 생활용품 물가
일기에는 분원에서 주문, 생산되는 각종 도자기의 이름과 수량, 쓰임새 등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의식주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과 수선공임에 대한 가격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수입된 물품들까지 소상하게 기록되었다. 따라서 도자기의 가격과 타 생활용품과의 가격 비교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글 박순관 도예가

 

<본 사이트에는 일부 사진과 표가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8년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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