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 비평의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몰락의 서사
열여섯 번째 작가: 안드레아 키스 코넬Andrea Keys Connell, 미스티 갬블Misty Gamble, 데이비드 퍼만David Furman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리조나주 경계를 넘어 나는 지금 미국의 뉴 멕시코 주에 있는 산타페 갤러리Santa Fe Clay Gallery에 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되어진 작가는 세계적으로 조명을 받고 있는 도자 구상 조각가들이다. 그들 중에서 나는 유난히 안드레아 키스 코넬Andrea Keys Connell, 미스티 갬블Misty Gamble, 그리고 데이비드 퍼만David Furman의 작품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분모는 모더니즘의 미술의 사생아로 버림받았다가 20세기 후반에 다시 당당히 현대 미술의 베뉴venue로 들어온 이야기하기, 즉 ‘네러티브Narrative, 서사’라는 장르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설명적이다’, 혹은 ‘너무 직설적이다’라는 단편적인 미니멀리즘의 시각에 반세기 동안 고요히 숨죽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던 그 ‘네러티브’를 구가하는 작가들을 만나러 간다.
네러티브Narrative는 20세기 후반에 시각예술과 문학에서 주목받은 하나의 예술 양식이었지만, 그 기원은 민요, 설화, 민담, 신화 등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하나의 이야기로 존재했던 모든 양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네러티브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구전동화와 같은 구어적인 형식이나, 고대 동굴벽화의 주술적인 그림과 중세의 성화와 같은 시각언어로도 존재해왔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네러티브’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표현의 욕망이자, 삶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상징주의 회화와 표현주의 작품들 속에서도 네러티브적인 요소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귀스타프 모로, 퓌비 드 샤반느, 오딜롱 르동과 같은 상징주의 화가나, 뭉크, 쉴레, 크림트와 같은 표현주의 화가들은 회화와 조각을 시각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사고의 문제로 인식했고, 산과 들에서 주제를 찾는 대신에 다른 동료들과 문학, 철학, 신화등의 열띤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의 주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1)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신화적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들을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시켰다. 하지만, 네러티브를 통해 외부세계의 이야기와 그 이미지를 모방해 온 서양 미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2)의 모더니즘 시대’에 다다르자 문학적 주제와 네러티브를 일관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3) 대상과 사물의 구상적 표현이나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네러티브적 표현은 ‘저급한’ 혹은 ‘낮은 단계의’ 예술로 취급된 것이다. 이 모더니스트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이야기하기적 표현보다는 물질 자체와 형태에 집착했고, 외부세계에 대한 의미부여 대신 내면세계로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미스티 갬블의 아버지는 유명한 꼭두각시 인형극 감독이었다. 미스티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세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꼭두각시 인형극의 도우미를 했었다. 특히 1998년 이란에서 열린 ‘세계 인형극 페스티발7th International Puppet Festival in Tehran’에 초대될 만큼 아버지는 성공적인 꼭두각시 인형극 공연자였다. 작가의 이런 경험은 그녀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로서 작용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꼭두각시의 단원으로 살아온 삶이 가져다주는 자유분방한 삶과 거침없는 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미스티가 어느 순간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정착민들에게는 너무나 무례하고 비정상적인 행위로 비춰져 온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일까? 미스티는 일련의 작품시리즈 ‘Chapel, Bid Hair, Sweet Terror’에 등장하는 익살스럽지만 풍자적인 인물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보여지는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사회의 기대감에 대한 도전적인 작품들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도덕이고, 과연 미의 기준은 무엇인가’란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최근작에서 미스티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가 희미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실물크기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제스쳐와 표정을 탐구해왔다. “이 노숙한 아이들의 얼굴은 기괴하고 또한 아름답다거나 달콤하거나 무시무시합니다. 이 아이들은 죄를 지을 기회가 주어질 때 순수함의 개념에 도전합니다. 사회의 도덕과 규범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부족으로, 이 아이들은 과장된 감정적인 상태를 표현합니다.” 미스티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간략히 마무리 지었다. ‘얼빠진 영혼 단장시키기, Primping the vacuous soul’ 라고 언급했던 미국 도예비평가 낸시 설비스Nancy M. Servis의 말처럼 미스티는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을 무시한 채 천편일률적인 ‘보편성’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사고에 일침을 가한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