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피워두고 청년이 앉아있습니다. 적막 속에서 피워 오르는 작은 불이 그를 고요하게 만듭니다. 아니 고요하기 위해 세상의 적막 속 불을 피우고 응시하며, 자신의 내면을 돌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통가마는 원시의 불이자 인류도자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불입니다. 여러 공예운동으로 발전한 세련된 현대 도자의 뿌리이자 모체인 것입니다. 산업의 발전, 전통문화 고취와 불의 신비감 등으로 장작가마는 80년대에 들어 본격적인 재 부흥의 시대를 맞았고 한국도자 정체성 의 부활과 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국제사회에 한국 장작가마 역사와 현황을 알리고자 지역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던 가마를 ‘통가마’라고 일원화시키고 그 작업의 ‘얼sprit’을 위해 인생을 건 우리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한반도 도 자의 뿌리를 잇고자 하는 노고와 홀로 불 앞에 서서 혼란의 시간을 참아내고 이겨낸 그들에게 눈물의 찬사를 보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설계된 도면이나 선생의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술의 전수가 아닌, 오직 정신과 태도였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문화적 기억’의 개념을 가져다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홀로 산과 밭을 뒤지며 옛 가마터와 파편에서 삶의 영감을 받고 인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두 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첫 가마를 짓고 불을 놓아 홀로 선 그들이 눈앞에 선합니다.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고 친족의 동의조차 구하지 못한 외로운 삶의 첫 발이였지만 그 찬란한 눈빛과 장작 하나하나에, 손길 하나하나가 그려집니다. 그들의 불은 좋은 도자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넘어 한반도 도자의 ‘얼’을 잇고자 하는 의지와 투지로서 찬란히 흐르는 이 땅, 도자의 강 한줄기가 되었습니다.
장작을 연료로 사용하는 수많은 가마가 지어졌고, 지어지고 있습니다. 전통 장작가마의 총량이 많아지고 그에 따른 혈기와 반짝이는 시선을 가진 젊은 작가들의 출현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그들의 시각적 언어는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정신을 조화롭 게 담아낸 작품을 만들며 우리 미술의 또 다른 길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앞서 시작한 장작가마 작가로서 몇 가지 몸에 담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도자는 지구자연의 무수한 시간 동안 바위가 풍화, 침식, 퇴적된 상태의 흙(점토)을, 다시 단단한 바위로 돌려놓는 작업입니다. 다시 말해, 거대한 서사의 시간을 짧은 시간 안에 거꾸로 돌려보내는 회귀순환 구조에서 자연과 나의 연결된 관계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타 예술보다 더욱 자연에 대한 자율 책임성이 요구되는 업業입니다.
자본중심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도예가는 특히, 물질을 만들어 내는 구조의 업業이지만 적어도 그 속도와 방향에 대한 예술적 대안과 같은 의무적 고뇌는 끊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구자원인 나무를 소비하는 것과 소진하는 것에 개인이든 기관이든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잘 마른 장작, 좋은 나무를 찾고 잘 보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나무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인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예를 들어, ‘재료를 소중히 여기지 않거나 고마워하지 않은 요리사!’의 음식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맛있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뭐 처음에야 대충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요리연구가의 태도는 결국 일상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음식 재료에 고마움이 없는 요리연구가가 어디 있냐고요? 대중 문화권력을 이용하여 음식단가를 위해 저질재료를 사용했다는 뉴스가 간간이 들려옵니다. 비단 이 현상이 전통 요식업계만의 문제는 아닐 듯합니다. 자본력을 이용하여 한 지역의 장작을 모두 선점한다거나1), 연료로만 여겨진 마당에 널브러진 장작들, 장작가마 심포지엄, 워크숍 등 형식적이고 일회성 이벤트로 소비되는 장작으로 어떻게 전통도자문화 정체성 정신을 함유할 수 있겠습니까? 정신은 매우 사소한 현상과 현장 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극히 당연한 마음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상기해 봅니다. 지구자원 소진에 따른 탄소배출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부여된 권한 사이에서 자구적 고민 없는 번조행위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장작 삼 개월, 흙 삼 개월, 도자기 만드는데 삼 개월, 불을 일으키는 옛 가마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도공의 식솔들. 가마 한번 망치면 한 해 농사 망친 대가로 줄줄이 그들의 자식들은 최소 육 개월은 피죽으로 살아야 했을 테지...’
몰입은 실존에서 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예술을 담보로 생존하는 우리입니다.
절대반지와 같은 도자기가 어디 있겠냐만은 혹이라도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면 온전한 몰입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 번 의 발길로 쌀 한 톨이 만들어진다는 옛말처럼 백 번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 장작가마 작업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이 담긴 영감 있는 작품으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가마 앞에 쌓여진 담배꽁초, 맥주 캔, 잡담, 스마트폰으로는 몰입할 수 없습니다. 몰입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낭만은 모닥불 앞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도 어려운 세상에서 몰입 없는 행위로 도자기를 만들어 먹고 살 수도 없으며, 절대 한국 장작가마의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도 없습니다. 존중과 존경의 허상에서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몰입이 결여된 예술은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예가로서 살아내기도 어렵습니다.
“통가마의 불은 어떻게 지피나요?”라는 질문을 예전에 받았습니다. “네, 가마 청소부터 하고요, 벽돌은 이렇게 다루시고요....” 말을 자르고는 “그러니깐 어떻게 불을 때어야 잘하는 겁니까?”의 응수는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나의 힘을 빼놓았습니다. 장작가마의 기술접근 방식은 말 몇 마디로 될 것이 아니고 또 그가 원하는대로 진술한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실현화 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작가마 작품은 자연성을 담보하고, 인간노동의 예술이며, 무의식 시각물2)의 표상인데 말입니다. 빠른시간 내에 좋은 결과를 원하는 마음이야 이해되지만 그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제주도 한 달 살이 후 제주에 대한 책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언어나 문자로 전해질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매번 다른 변수(기압, 습도, 장작건조, 가마상태, 기물크기, 사람의 컨디션 등)를 경험 속에 습득 하고 감각하며, 그 상황에 맞게 행위를 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자연의 수려한 색상도 한국 전통 도자의 아름다움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덧붙여 기업과 예술이 추구하는 가치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문화행사에서 경제효율성의 기준으로 진행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뭣이 중헌디?’를 고민하게 됩니다. 느리고 천천히 풀어야 할 문제를 급히 하다 보면 탈이 나지 않겠습니까? 이미 탈이 났고요.
정신적 삶에 대한 찬사는 어디에 해야 하는 겁니까? 기업경영과 예술작업이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지 않는다면 전통문화는 정신이 소멸된 형식만 남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짧은 시간에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작업입니다. 장작 불은 도예가 최고의 퍼포먼스! 생활에서 불이 사라진 시대 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은 지구자연과 생명체의 중요 요소입니다. 도시화 과정에서 살아있는 불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언젠가 부조화의 결과로 초래하는 사회나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더욱 도예가의 불이 특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 성향과 기호겠지만 이제 세상에 가마불을 좀 나뉘어도 좋을 듯합니다. 자연불과의 직접적인 교감은 인간의 자연성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열린 마음은 협업의 시대를 이끌고, 상생하는 협업은 협소화된 관계의 공예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장작가마에 매료된 이와 작가들 간의 상생 협력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예시장은 올림픽 게임처럼 누가 더 잘 만들고 잘 팔고의 경쟁의 장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공예와 한국 장작가마 작업의 시장 확장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선의의 힘을 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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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료인 장작화목은 자본으로 구할 수 있는 듯 하지만 나눔이 없는 예술은 탐욕입니다. 가난한 젊은 도예가들을 위해 지역 장작을 모두 선점하는 행위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2) 장작번조시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나뭇재가 날리어 작품 기면에 융착, 착색의 과정. 무의도의 의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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