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2025.10월호 | 전시리뷰 ]

김현철×김은형《다시: 흙으로부터, Again from Clay》_2025. 9. 13. ~11. 13.
  • 김은형 작가
  • 등록 2025-11-03 10:19:04
기사수정

다시, 흙으로 부터


흙은 인류가 가장 오래 다뤄온 재료 중 하나이자, 시간과 장소를 고스란히 품는 매체이다. 그 표면은 지질학적 층위와 기후, 식생, 그리고 인간의 손길을 모두 기억한다. 특정 지역의 흙은 단순한 물질적 성질을 넘어, 그 땅의 역사와 문화, 기술, 사회적 관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흙은 그 자체로 기록이며, 동시에 무한한 변형과 재해석이 가능한 개방된 언어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기린산 자락 아래 위치한 만복사萬福寺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시기에 창건된 대찰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아침이면 수백 명의 승려가 시주를 받으러 나가고, 저녁이면 돌아와 장관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찰은 불교 의례의 중심지이자 지역 교류의 거점이었다. 사찰 주변에는 도자기 가마터가 산재해 있었으며, 왕정동의 흙은 입자가 곱고 점성이 뛰어나 가마 소성 과정에서 견고한 형태를 유지하는 특성으로 알려 졌다. 이는 사찰에서 사용된 의식구와 일상용기의 주요 원료가 되었고, 해당 지역의 도자 제작 전통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문학적 기록 속에서도 이 지역의 문화가 확인된다.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에 수록된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로, 승려·청년·여인 등 인물들이 얽히는 운명적 사건을 담고 있다. 주인공 양생이 부처 앞에서 던진 ‘저포(주사위)’와 그로 인한 인연은 우연과 필연, 만남과 이별이라는 인간 경험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서사는 전란과 재난, 단절의 역사 속에서도 관계와 기억이 생성·소멸·순환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 《다시: 흙으로부터》는 바로 이 왕정동의 흙과 장소성에서 출발한다. 도예가 김현철은 해당 지역에서 직접 흙을 채집하여 달항아리로 빚었으며, 가마 속에서 장시간 소성하여 유약과 불이 남긴 표면의 변화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러한 제작 과정은 물질적 실험이자, 전통적 제작 방식의 현대적 재맥락화다.



시각예술가 김은형은 이러한 도자 작업을 회화·설치·영상으로 확장한다. 완전한 형태의 항아리뿐 아니라 파손된 조각 또한 전시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제시된다. 파편은 결핍이 아니라 또 다른 완성의 형태로 읽히며, 도자 제작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의 미학’을 시각화 한다. 달항아리의 곡선은 회화 속 색의 파형으로 번안되고, 파손된 조각은 서로의 틈에 기대어 구조물을 이루며, 역사적 장소의 기억은 투명도의 레이어와 겹겹이 쌓인 색채로 재구성된다. 회화 작업에서 청색과 녹색 계열의 색 면은 달항아리의 호흡과 왕정동의 시간성을 반향하며, 설치 작품에서는 나무 기둥과 도자 파편의 조합을 통해 세대와 세대, 물질과 물질이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지탱하는 관계성을 제시한다. 영상 작업은 흙·불·형태·이미지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통해, 시간과 장소, 매체 간의 순환적 관계를 드러낸다.


김은형 「파동5-공명: 서로를 울리는 진동, 관계의 떨림」 130.3×162.2cm 각 2패널 | 

아크릴 온 캔버스 | 2025 

(좌)김현철 「달무리」 30×30×32cm | 산화소성 | 2023 

(우)김현철 「휴식」 44×44×51cm | 2024



---------------------------------------------------------------------------------------------------------------

김현철 Kim Hyunchul 

1958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김현철은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 작업을 시작해 30년 넘게 흙과 불을 다뤄왔다. 전통 도예의 기법을 이어가면서도 현대적 조형 감각을 더해, 흙이 품은 시간과 변화를 탐구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대표작은 남원 왕정동의 흙을 섞어 빚은 달항아리다. 가마 소성과 유약 실험을 통해 표면에 남는 불의 흔적과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며, 완전한 형태뿐 아니라 파손과 변형까지 작품의 일부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재료의 물성과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예술적 본질로 받아들이는 그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김현철은 남원시민도예대학 대표 강사를 역임하며 지역 도예 문화의 확산과 후학 양성에도 힘써 왔다. 그의 작업은 흙에서 시작해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 속에서, 그 과정에 남는 흔적과 변형을 예술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김은형 Kim Eunhyung

김은형은 암스테르담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로 회화·드로잉·설치·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장소성과 물질성을 중심으로 개념적 탐구를 전개해 왔다. 2009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예술대학교 석사 졸업 후 유럽을 중심으로 프로젝트 기반 작업을 이어왔으며, 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퍼포먼스 등 매체를 넘나드는 다층적 접근으로 주목받았다.

최근 전시로는 2024년 조은숙 갤러리 개인전《기억의 색 The Color of Memory》이 있으며, 해당 작업은 미술평론가 김복기와 네덜란드 큐레이터 헹크 슬라거Henk Slager의 평론을 통해 개념적 깊이와 국제적 확장성을 인정받았다. 영국 Aesthetica Art Prize (UK, 2016)과 Celeste Prize (Italy, 2016) 수상 경력을 갖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 장소 특정적 재료를 기반으로 한 회화와 설치 작업을 통해 물질의 변형과 시간성을 탐구하였다. 



사진. 앤케이갤러리 제공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5년 10월 호를 참조 바랍니다. 정기구독(온라인 정기구독 포함)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모든 과월호 PDF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0
비담은 도재상_사이드배너
세라55_사이드
설봉초벌_사이드배너
산청도예초벌전시장_사이드배너
전시더보기
월간세라믹스
도예마당더보기
대호단양CC
대호알프스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